0

메르의 생각

엔화 이야기 1 (feat  수에즈운하,중동전쟁, 플라자합의)

메르

2024.07.25

6
0

 

 

https://blog.naver.com/ranto28/223461322489?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엔화는 언제 강해질까? (feat 일본은행이 달라졌어요)

엔화의 가치가 계속 비실비실하고 있다. 일본은행이 예전과 다른듯해서 상황을 정리해 본다. 캐리 트레이드...

blog.naver.com

 

5월에 쓴 위글의 한줄 코멘트에서엔화가 언제 강해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한 줄 코멘트. 워낙 복잡한 원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환율을 예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7월쯤 엔화 강세가 시작될 것 같다는 기존 예상은 유지하겠음.

7월이 되었고 엔화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7월31일에 일본은행의 정책회의가 있다.

브레이크에 발만 뗄지, 악셀까지 밟을지 일본은행의 결정을 지켜봐야한다.

© photosbyedoardo, 출처 Unsplash

환율은 단기적인 흐름도 봐야하지만, 과거 역사를 장기흐름으로 살펴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엔화와 관련한 장기흐름을 재정리를 했는데, 내 글이 그렇듯이 여기저기 둘러가다보니 도입부가 너무 길어졌다.

200번이 넘다보니, 편을 나눴다.

1편은 플라자 합의로 이어지는 흐름을 정리했고, 동남아외환위기, 부동산 버블, 반도체 소재 수출금지 내막등이 이어진다.

1. 이집트는 기원전부터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려고 노력을 해왔음.

© nwahba, 출처 Unsplash

2. 당시 기술력으로 전체를 연결할 수 없어서, 수에즈에서 나일강까지 운하를 만들고, 나일강을 통해 물류 운송을 시도해 왔던 것임.

3.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공하며 운하를 개통시켰지만, 운하로 적이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시 운하를 파괴함.

4. 19세기에 증기선이 발명되고, 식민지 확보 경쟁에 나서자 유럽과 인도양을 단축하는 운하의 필요성이 커지게 됨.

5. 프랑스가 나일강을 통해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격적인 인공운하 건설에 나서게 됨.

6. 운하 건설 비용은 이집트 정부와 프랑스 민간투자자들이 반반씩 부담을 했고, 지분도 그렇게 나눠가지게 됨.

7.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이 됨.

수에즈 운하 사진 : Wikipedia

8. 수에즈운하 건설로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거리가 최대 9,900km 단축됨.

9. 세계사를 보다 보면, 보통 이럴 때 영국이 등장을 함.

10. 이집트 정부는 경제발전을 이룬다는 목적으로 인프라 건설에 엄청난 비용을 지출함.

11. 인구가 500만 명밖에 되지 않은 이집트에 1,400km의 철도, 400개의 다리, 4,500개의 학교를 건설한 것임.

© meganlee007, 출처 Unsplash

12. 과다한 인프라 투자로 1년 수입이 800만 파운드인 나라의 국가부채가 9.000만 파운드까지 증가함.

13. 초기 수에즈 운하는 물동량이 부족해서, 공사비용을 조달하려고 발행한 채권을 운하수입으로 상환하기 힘든 상황이었음.

14. 채권 만기가 돌아오자,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이집트 지분(44%)를 매물로 내놓음.

15. 수에즈운하 지분이 시장에 나오자, 영국이 국가 전체 예산의 5%에 해당하는 400만파운드를 지불하고 전체를 매수하게 됨.

16.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의 소유가 된 것임.

17.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쿠데타의 주역인 나세르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정권을 장악함.

18. 나세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과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에 동시에 접근하며 양측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외교를 시작함.

19. 초기에 양다리 외교가 성공해서, 서방으로부터는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지원받았고, 동구권에서는 무기를 확보함.

20. 이집트의 양다리외교에 서방이 반발해서, 지원하기로 약속한 아스원댐 건설비용을 주지 않았음.

© salmanrafiq, 출처 Unsplash

​​

21. 서방이 지원을 줄이자, 나세르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외교를 강화하고,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함.

22. 수에즈운하의 대주주인 영국과 프랑스는 이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이스라엘을 앞세워 이집트를 공격함.

23. 이스라엘은 홍해로 나가는 육상 통로를 가지고 싶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음.

24.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공격했고, 11월 5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의 공수부대가 수에즈운하를 점령함.

25. 당시 세계의 파워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 기존 제국주의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의 양강 체제로 넘어가는 시기였음.

26. 미국과 소련은 지는 해인 영국과 프랑스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집트를 공격한 것에 각자의 방법으로 분노를 표시함.

27.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부가 보유한 영국국채를 전량 매각하겠다고 위협했고, 러시아는 핵 공격을 할 수 있다고 나선 것임.

28. 12월 22일, 영국과 프랑스는 소득없이 수에즈운하에서 철수했고, 이스라엘은 홍해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며 목표를 달성함.

29. 이것을 2차 중동전쟁이라고 부르게 됨.

30. 2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나세르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수에즈운하를 지킨 것이 됨.

31.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낸 영웅대접을 받으며 지지율이 크게 올라가게 됨.

32. 1967년 6월 5일, 새벽, 나세르는 2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확보한 홍해로 가는 육로를 봉쇄하려고 함.

 

33. 전쟁을 하려는게 아니라 이스라엘에 무력시위를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려는 쇼였음.

34. 이스라엘로 가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군대는 해변에 포대만 배치를 하고 선박 통행을 막지는 않았음.

35. 나세르는 선박 봉쇄와 거의 동시에 이스라엘과 협상을 시도함.

36. "이스라엘 선박들이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 국기만 내리면 통과를 허용하겠다"라는 조건을 제시했던 것임.

37. 나세르 생각에 이 조건은 이스라엘이 받을 만한 조건이었음.

38. 이스라엘은 나세르의 협상을 받지 않았음.

39. 이스라엘은 해안 봉쇄가 시작된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전투기들로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기 시작함.

40. 당시 이집트의 군 최고사령관인 아메르 원수가 시리아 방문후 전용기로 복귀를 하는 중이었음.

41. 최고사령관이 탄 전용기가 방공군의 실수로 대공미사일등에 요격될까봐, 방공 시스템에 대한 가동중단 명령이 내려진 시간이었음.

© wadeallen13, 출처 Unsplash

42. 군부 지휘관들도 아메르 원수가 시리아에서 돌아오는 것을 영접하기 위해, 카이로 국제공항으로 이동을 한 상태였기도 함.

43. 3시간의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이 보유한 450대의 항공기 중 300대 이상이 파괴되었고, 공군과 레이더 기지 등이 모두 파괴됨.

44. 이스라엘 공군이 하늘을 장악하자, 전차를 앞세운 육군은 수에즈운하까지 거침없이 진격을 했고, 6월 10일, 이집트가 항복을 함.

45.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6일간 전쟁으로, 이집트는 2만 명 이상이 전사했는데, 이스라엘 전사자는 800명 정도였음.

46. 3차 중동전쟁에서 군부 정권의 무능한 패배는 이슬람주의 종교집단이 세력을 불리는 계기가 됨.

47. 1973년 10월 6일은 이스라엘의 휴일이었음.

48. 이스라엘의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난 날,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이 전면적인 기습공격을 시작함.

49. 이집트군은 휴가로 병력이 많이 비어있는 이스라엘 방어벽을 2시간 만에 돌파하고 이스라엘로 진격하기 시작함.

50. 이집트군은 개전 첫날 이스라엘 전차 150대를 격파하였고, 지대공 미사일로 이스라엘 전투기의 10%를 파괴하는 대성공을 거둠.

51. 2일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전차만 800대가 파괴되는 최악의 상황이 됨.

52. 당시 미국 대통령은 닉슨이었음.

53. 대통령 재선을 위해, 야당인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다 들킨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상태였음.

​​

© gregbulla, 출처 Unsplash

54. 닉슨은 국민의 시선을 중동전쟁으로 돌리기 위해 이스라엘에 최대 규모 지원을 시작함.

55. "니켈 그라스 작전"이라고 명명한 무제한 군수품 지원 작전이 시작됨.

56. 미국의 전투기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로 날아갔고, 군수품 보급 선박도 빠르게 출항을 시작함.

57. 공중급유기를 통한 전투기 지원에 한계가 있자, 미국은 항공모함 3척을 일렬로 배치함.

58. 항공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연료를 보급 받고 다음 항공모함까지 날아가는 식으로 이스라엘로 향하게 됨.

© veedubsimon, 출처 Unsplash

59. 33일간 계속된 미국의 무제한 물량 지원 작전으로, 파괴된 이스라엘 전투기와 전차 보다 훨씬 많은 물량이 이스라엘에 공급됨.

60. 급하게 소집된 50만 명의 이스라엘 예비군이 미국에서 들어온 최첨단 장비로 무장을 하고 반격에 성공하게 됨.

61. 반격에 성공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진격하려 하자, 소련은 이집트 영토로 들어가면 이집트에 핵무기를 제공하겠다는 경고를 함.

62. 이스라엘이 종전을 수용하며 4차 중동전쟁은 끝이 났지만, 유가상승은 시작이었음

63.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에 협력적인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지한 것임.

64. 중동 산유국들의 담합이 효과를 보이자, 이라크, 리비아, 이란, 이집트, 튀니지, 시리아가 석유가격을 대폭 인상하기 시작함.

65.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가격 인상으로 유가가 4배 이상 오르며 인플레이션이 시작됨.

66. 미국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함. ​

67. 최종적으로 미국의 기준금리가 21.5%까지 올라갔고, 이자를 낸다고 물건 살 돈이 줄어들며 경기가 박살 남.

68. 미국 중소기업의 40%가 망했고, 실업률이 10%를 넘기 시작하며 미국 제조업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임.

69. 미국 기준금리가 올라가며 제조업이 폭망했지만, 비싼 이자를 노리고 미국으로 돈이 몰려오며 강달러가 되기 시작함.

70. 강달러가 되자 일본이 혜택을 가장 크게 봄.

71. 엔저가 된 일본은 싸게 수출을 할 수가 있어서 수출이 대박 나게 됨.

72. 미국 무역적자의 40%를 일본이 내는 상황이 된 것임.

73. 1985년 9월 22일 미국 플라자 호텔에서 G5 회의가 열렸고 타깃은 일본이었음

74. 미국은 일본에 엔화 가치를 높이라고 압박을 했고, 수출 대부분을 미국에 하고 있었던 일본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

75. 플라자합의로 달러당 250엔이었던 환율이 120엔으로 반 토막이 나게 됨.

76. 환율이 반 토막 났다는 것은 일본 수출품의 가격이 두 배로 올랐다는 말임.

77. 일본은 수출이 크게 줄어들며, 플라자합의 다음 해인 86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됨.

78. 일본은 이것을 그냥 두고보지 않았음.

2편에서 계속.

 

Disclaimer

  • 당사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콘텐츠에 수록된 내용은 개인적인 견해로서, 당사 및 크리에이터는 그 정확성이나 완전성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본 콘텐츠는 고객의 투자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소재에 대한 증빙 자료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 모든 콘텐츠는 외부의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없이 크리에이터의 의견이 반영되었음을 밝힙니다.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정리해 봅니다. 네이버 메르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팔로워 null

이런 글은 어떠세요?